따뜻한 밥상 /강영은
우주의 텃밭에서 길러온
밥알 같은 열매들을 둘러앉히고
따뜻한 밥상 차리는 감나무 좀 봐
내 몸이 밥상이라고 잘 익은 열매 한 알
툭, 던져 주는데
햇살로 지은 고봉밥 한 술,
햇살무침 한 접시,
골고루 담겨있는 한 알의 열매
얼마나 먼 길을 돌아 왔는지
발바닥에 쩍쩍 금이 가 있다
봄여름 가을 지나 내 손에 쥐어준
이, 고마운 후식
잘 익은 슬픔으로 배가 부른데
밥상 다리처럼 나를 일으키는
오래된 상처는 기쁨인 것
낮달처럼 구부러진 다리 펴고
햇살을 꾹꾹 눌러 뭉쳐
둥근 주먹밥 던져 주는
저,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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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슐리퍼는 <시와> 인식>에서, 시가 주술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의인법을 들고 있다. "영들에 의하여 살아 있는 세계를 겨냥하는 주술로부터 시는 자연의 대상을 너라고 말하는 관습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사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알게 모르게 의인법을 제일의 수사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주술은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의인화는 자연에 살아있는 유기체의 일부로 보고자 하는 생태학적 몸 의식이 은근히 담겨있는 것이다.
혹자는 의인법에서 인간 중심주의의 노출을 보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의인법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을 깨트릴 수 있는 수사법이 아닐까? 의인법은 인간 외의 생물들과 인간이 동등한 관계에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잇는 대표적인 시적 발상이다. 그리고 의인화 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장소는 몸이다. 의인법 중에서도 몸으로 형상화된 자연만큼 인간에게 친숙감을 형성하는 경우도 없다, 몸으로 표현된 자연,몸성을 지닌 자연은 인간과 연대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다른 어떠한 수사법보다도 용이하다. 몸으로 의인화된 자연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의인화된 자연은 살아 움직이면서 인간과 연락하고 있는 생명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얼마나 충분한가.
자연과 인간은 몸에 있어서, 인간과 인간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적극적인 교류를 하고 잇는 셈이다. 인간돠 인간은 서로 몸을 나누어 먹을수 없지만, 자연과 인간은 서로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나누면서 살아간다. 식물의 배설기관이나 배설물에 대해서는 아직가지도 생물학적인 명쾌한 답이 없다. 추정하자면, 식물학적으로 보면 열먀는 동물들의 분뇨에 해당되지 아노을까 싶다. 식물과 인간이 몸을 주고 받는 원시적인 순황관계를 통해 유추해냏 수 있을 듯 하다. 식물의 배설물인 열먀를 인간이 먹고ㅡ 인간의 배설물을 거름삼는 식물들, 이런 순환적 구조가 그 단적인 예가 아닐까.
우주의 텃밭에서 길러 온
밥알 같은 열매들을 둘러 앉히고
따뜻한 밥상 차리는 감나무 좀 봐
내 몸이 밥상이라고
노랗게 잘 익은 열매 한 알
툭, 던져 주는데
강영은,<따뜻한 밥상> 중에서( 다층, 2005년 겨울호)
자연은 인간을 위해 항상 신성한 밥상을 차려놓고 있다. 감나무가 감을 가득 열고 잇는 모습과 밥상의 비유는 토테미즘적 삶의 방식에 근거한 발상이다. 토테미즘에서 희생물과 먹이들은 깊은 영혼의 교류를 전제로 한다. 희생물로 차려진 밥상은 곧, 희생 제의의 의미를 지닌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몸을 나누는 일은 신성한 제의적 행위이다. 희생 제의는 생명을 걸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대문이다. 밥상은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몸으로 만나는 신성한 장소다. 감나무의 몸은 누구에겐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먹이가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밥상과 연결되어 있는 몸에서 잔인한 구것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도리어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건네는 헌신과 봉사의 힘이 아름답게 전달되어 올뿐이다. 몸으로 의인화된 감나무의 몸 앞에서 문명의 욕심은 겸허하게 내려놓게 될것이다. 가을에 막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뭄는 인간에게 차려놓은 따뜻한 밥상으로 인식할 수 잇는 자들이 시인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봄부터 가을까지 자연은 쉬지 않고 상다리 부러지도록 밥상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에게 어떤 밥상을 차려주었는가. 도리어 문명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의 상다리만 부러뜨리지 않았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심상 2005년, 5월호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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