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산딸나무
강영은
어두워가는 하늘에 꽃 모가지를 드리운 나무 성자, 가로 세로로 얽힌 몸통이 목전에 흰 피를 드리우네, 창백해가는 얼굴은 바람과 비례로 쏟아지네.
“너의 꽃잎은 십자가 모양을 하되 가시관을 두르고 꽃잎 끝에는 핏자국을 닮은 무늬를 지닐 것이다”자신을 매단 꽃산딸나무에게 예수가 말했다지
그 말은 네가 가엾다는 말, 너를 용서한다는 말이어서 백년에 한번 피는 입술처럼 내 입술이 흰 빛에 닿네
핏자국 번진 흰 빛은 얼마나 완벽한 생의 비유인가
피가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슬픔에 닿은 것처럼 오늘에야 십자가가 된 나무의 슬픔을 아네
빛이 꺾일 때마다 점점 그윽해지는 꽃 색깔, 수의처럼 따뜻하고 또한 서늘한 꽃 색이 아니었다면 나는 꽃산딸나무의 고통을 알지 못했으리
색깔론만 펼치는 풍경에 대해 순전한 향기를 게워내는 꽃산딸나무의 순교는 더욱 몰랐으리
세상의 수많은 色을 훔쳐 내 속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은 나도 십자가를 짊어지네 수상한 향기만 남은 나무계단처럼 꽃산딸나무 등에 기대어 찰칵, 나를 못 박네.
----강영은,[꽃산딸나무]({마고의 항아리}, 현대시학, 2015년)전문
■ 반경환의「명시감상」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죽어간 속죄양이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순교를 해간 문화적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유태교의 제사장과 장로들에 맞서서,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지배를 당하는 자’의 복음을 역설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간 예수의 비극적인 삶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죽음에는 순교자의 죽음과 비순교자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순교자의 죽음은 아름답고 고귀하며 만인들의 귀감이 되지만, 이 땅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죽음은 더럽고 추하며, 기껏해야 이 세상의 삶에 대한 허무감이나 그 분노만을 증폭시키게 된다.
나는 예수가 꽃산딸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예수가 못박혀서 죽어간 나무가 꽃산딸나무이고, 그 결과, 꽃산딸나무의 꽃잎이 십자가의 모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독특하며, 상징조작자들의 그것에 값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의 꽃잎은 십자가 모양을 하되 가시관을 두르고 꽃잎 끝에는 핏자국을 닮은 무늬를 지닐 것이다.”
혁명에는 성공을 했지만, 혁명의 과업은 좀처럼 완수되지를 않는다. 민족의 반역자인 독재자를 처형했지만, 그는 결코 어진 현자가 되지를 못하고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싫어했던 독재자를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간다. 이 세상의 삶이나 인간의 성향은 좀처럼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동일한 무대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동일한 주제들만을 되풀이 변주하고 있는 가면무도회만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가 꽃산딸나무가 되고, 꽃산딸나무가 시인이 된다. 이 삼위일체의 정신이 “피가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슬픔에 닿은 것처럼 오늘에야 십자가가 된 나무의 슬픔을 아네”라는 시구와 “색깔론만 펼치는 풍경에 대해 순전한 향기를 게워내는 꽃산딸나무의 순교는 더욱 몰랐으리”라는 시구와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色을 훔쳐 내 속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은 나도 십자가를 짊어지네 수상한 향기만 남은 나무계단처럼 꽃산딸나무 등에 기대어 찰칵, 나를 못 박네”라는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시구들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 피어나게 된다.
예수의 순교가 꽃산딸나무의 순교가 되고, 꽃산딸나무의 순교가 시인의 순교가 된다. 모든 꽃이 자기 자신의 생존과 그 노력의 결정체이듯이, 그들의 순교에는 좌우의 이념----색깔론이 그것이다----을 뛰어넘고, 이 세상의 수많은 色들----수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취향과 성격들----을 종합하여, 궁극적으로는 시의 공화국으로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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