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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비단구렁이

호박

by 너머의 새 2015. 9. 7.


 

 


호박/ 강영은


9월의 숲 속 길을 간다
쓰러진 나무둥치 위로 싱싱하게 뻗는 넝쿨들
발목에 감기어드는 그것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몸의 탯줄이라 말하고 싶다

내 눈을 뚫고 들어오는 푸름이 하도 깊어
까마득히 잊었던 태胎의 길로
직행하는 기억들
어머니의 밑동을 찢고 나오던 그날의 울음도
저렇듯 시퍼랬으니

그 울음의 뿌리가 미지를 향한 두려움 탓만은 아닌
태어나지 않은 나와 태어난 나의 간극에서 자란
둥근 열매의 전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제 이름을 잊은 채 산정에 묵고 있는
저 오래된 몸들도 제 몸의 바깥을 향해
그림자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지상의 모든 길을 끌어안고
둥근 길을 가고 있는 그 빈집은
밤마다 무량한 별빛에 닿고 있을까

소멸과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은
길고 긴 날의 저녁이 진통을 끝내면
언덕 넘어 사라진 새들처럼

나는, 한 덩이
붉은 노을을 순산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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