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질적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발현의 시/ 강영은
-김세형 시집, 사라진 얼굴 (불교문예>을 읽고-
1, 영혼과 내통하는 구도자
시인이란 존재는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해, 혹은 가능의 불가능성에 대해 역설의 전복을 거듭하면서 한 뙈기의 시 밭을 일구는 자이다. 김세형 시인은 그 밭을 경작함에 있어서 시인의 지향하는 여정의 형태가 피안 보다는 피안이라 일컬어지는 이상향을 향하는 과정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피안을 향하는 여정 속에는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으로,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기도하는 오체투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난 결코 사랑의 극지인 피안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피안은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언덕이 아니다/그러나 그곳을 향한 내 긴 여정, /그 헛된 날개 짓이야말로 나의 몹쓸 사랑이며 / 나의 몹쓸 도피안이다"라고 말한 '자서'에서 보듯 시인은 헛된 고통의 날개 짓일망정 끝없이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끊임없는 시작노고의 길을 가는 것이 지천명의 사명임을 암시한다. 도달할 수 없다고 자신이 이미 정의를 내린 피안의 언덕, 사랑의 극지는 어디일까.
17c의 철학자 파스칼은 일찍이 소외감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거대한 공간"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자아의식과 우주와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을 때 느끼는 본질적인 소외감, 그 심리적 공간을 넘어선 곳, 우주와 합일되는 영원성의 공간, 그 비가시적인 공간을 시인은 가질 수 없는 피안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그 사랑만이 자신이 영원할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란 흔히 회자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성과 영혼, 몸과 마음, 감각적 취향과, 초월에 대한 관계성에 있어 보다 근원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존재 근원에 대한 탐색이 사랑이라는 화두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시인은 보여준다. 다음의 시편을 보자.
왜 저 흉터는 내게 찡긋 윙크하고 있을까
왜 저 슬픈 미소는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드는 것일까
왜 사랑이 남긴 저 흉터는 저리도 매혹적인가
왜 저 아문 상처가 내 영혼과 내통하는 통로인가
왜 저 끊겨진 숨 속에 숨이 숨어 있는가
왜 끊겨진 숨이 내 숨을 부르고 있는가
왜 난 저 슬픈 숨결에 키스하고 싶은가
왜 난 그 숨은 숨결 속에 숨고 싶은가
왜 달마는 닫힌 숨길을 열고 돌아가 버렸는가
왜 저 단장의 슬픔이 내게 웃고 있는가
왜 그런데 그 기쁨이 내겐 아직도 슬픔인가
- <배꼽> 전문-
어머니 배꼽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을 하나의 우주를 여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배꼽은 모든 존재의 시발점이며 근원적 모태 속에서 생성된 또 하나의 우주와 연결된 통로이자 고리일 것이다. 배꼽을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는 제유로 삼는다면 존재의 또 다른 제유인 얼굴과 일맥상통한다. 배꼽에서 나와 무덤까지 가는 도정에서 우리는 존재의 실재인 수많은 얼굴과 부딪힌다. 허상과 실상을 두루 가지고 있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우리 내면의 다른 모습이다. "사라진 얼굴" 들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통해 가면을 통한 자아의 새로운 발현처럼 사라진 얼굴들을 보여주려고 한다. 내면에 숨겨진 사랑의 상처마저 영혼과 내통하는 통로라고 진술하는 시인의 정신적 염결성에는 기독교, 불교, 유교를 고루 섭렵한 시인의 흔치 않은 삶의 여정이 단단하게 여물어 있는 것 같다. 물론 불교적 사유가 대부분이나 이러한 삶의 여정은 시가 아닌 삶에서도 다분히 구도자 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2, 정신적 염결성의 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말은 자신이 바라는 형상을 '신'이라는 우주에 투영된 존재를 만듦으로써 본질적 자아에 대한 구원을 만족시키려는 다분히 의도성을 띤 말이지만 종교의 역할 면에서 볼 때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신, 다른 말로 종교에 대한 시인의 보다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구도의 자세는 이처럼 이르지 못할 피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해 스스로 고통을 겪으면서 수행해나가는 구도자처럼 지극한 정신의 염결성으로 다가온다.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등뼈가 활처럼 흰 늙은 소 한 마리가 구
부정한 낮은 언덕배기 풀밭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오랜만에 한가하게 쭈그렁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
늙은 소가 입가에 침을 질질 흘려가며
우물거리고 있는 것은 여물이 아니다
자신의 고된 생애에 대한 되물음이다
- 중략-
수없는 되새김질 끝에 소가 얻은 것이라곤
입 속 가득한 여물 같은 되물음 뿐이었다
평생 풀지 못한, 흰,
- <소> 부분-
되새김질하는 소의 모습에서 평생 풀어야 할 물음을 지니고 사는 존재성을 찾아내어 형상화한 작품인 이 시는 고된 생애를 반추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되새김질하는 소에 다름 아님을 이야기 한다. 여물과도 같이 씹히는 건 생애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일 것이다.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를 비롯하여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철학자며 사상가, 혹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왔지만 시적 화자는 그 해답을 찾으려고 수행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를 한 채의 사원으로 삼아 생에 대한 본질적 천착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남아 있음을 말한다. 평생 풀지 못할 흰, 그 물음을 끌고 가는 소가 한 마리 더 있다.
설산에 흰 소 한 마리가 산다.
난 젊은 시절 설산으로 홀로 들어가
흰 소를 찾아 반 평생을 헤매었으나
결국 흰 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난 늘그막이 다되어서야
지친 노구를 이끌고 음메~ 음메~
서럽게 울어대며 설산을 내려와야 했다
-설산의 흰 소-전문
이 시는 되물음의 연속과정에 있는 시인 자신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설산은 붓다의 팔상성도 중 다섯 번 째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에 나타나는 산으로써 출가수행자가 된 석가모니가 6년 동안 수행한 히말라야 산을 말함이다. 그 설산의 흰 소는 부처와 같은 이상형의 인간, 부처처럼 완전한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이 시의 화자가 찾아 헤맨 것은 또 다른 나, 완전한 나를 찾는 구도자로서의 나인 셈이다. 이처럼 둘이며 하나인 나’ 라는 존재 속에는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세계를 응시하는 제행무상의 경지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정신적 염결성이 제법무아의 경지까지 이전되는 자기 확인의 절실한 욕망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3, 기억의 발화지점에서
누구는 유치원에서 부터 이미 세상을 다 배웠노라고 하지만
난 유치원도 가기 전 그보다 아주아주
어려서 부터 요 위에서 세상을 이미 다 배웠다
밤새 요에다 황금빛 세계지도를 아주 자랑스레 그려놓고
늦은 아침 어릴 산토끼처럼
졸린 눈 두 손등으로 부비며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
세계지도가 그려진 요에서 두 무릎 끓고 앉아
마치 해탈한 붓다처럼 반개한 두 눈으로
세상을 지그시 한 눈에 내려다보며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겨운 고해바다인가를 온 몸으로 깨달았다
내 키 보다 훨씬 큰 키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검정 고무신 질질 끌며 왕소금을 얻으러
마을 집집 대문간을 탁발승처럼 전전하며
굵은 눈물을 질질 짜내며
거듭거듭 깨달았다
세상살이란 자신의 눈물의 수차를 끊임없이 돌려
염전 밭을 일구며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고행 승의 고된 길이라는 것을
왕소금 같은 눈물을 세계지도 위에 뚝뚝 떨구며
구태여 세상을 다 살아보지 않아도 이 풍진 세상에
왜 빛과 소금이 필요한 것인지
난 어려서부터 요 위에서 이미 다 깨달았다
나는 요나라의 어린 요 임금이었다
- 나는 요나라의 어린 요 임금이었다- 전문
시가 하나의 미적 구축물로 재현되는 과정에는 자기 발화가 전제되어진다. 경험이 사유와 결합되는 지점에서 위의 예문처럼 시인은 발화자며 수신자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치루어 봤을 경험이 시인의 사유와 만나면서 시인은 과거의 경험을 발화하면서 그 과정 속에 농익은 사유를 수신하는 역할을 한다. 요나라는 그러한 기억의 발화지점이다. 문득,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遼,916~1125년)를 패러디한 언어적 유희가 미소를 떠오르게 하는 기억의 발화지점이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나라는 사유와 접목되면서 수신자인 시인에게 눈물의 수차를 돌리어 염전 밭을 일구어내는 고행승의 고된 길을 시작한 나라이며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린 요임금을 깨우치게 한 구도의 설산으로 탈바꿈한다. 발화와 수신의 힘이 이 시를 엮어내는 힘이라고 한다면 이 시는 시인의 시에 대한 구도적 자세, 혹은 그러한 시정신의 발로가 이미 생태적으로 몸에 배인 것임을 알려준다. 요위에 그려진 황금빛 세계지도, 그 세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해탈한 붓다가 되는 일, 어린 요 임금이 되는 일이다. 그 어린 요임금이 사랑의 극지며 피안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오리 궁뎅이에서 설산까지, 세속에서 성속을 향하는 가깝고도 먼 길이다.
4, 가깝고도 먼, 1cm의 간격과 오리의 거리
낙원, 혹은 천당이라는 이상향을 성속이라고 한다면 시적 주체가 만나는 이 세상은 세속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에 나타나는 성속과 세속의 시간과 공간은 어느 만큼의 거리에 위치 안리 되어 있는 것일까. 시인에 의하면 그것은 지극히 가깝고도 먼,1cm의 간격과 오리의 거리를 지니고 있다.
얇은 아가미가 흔드는 가벼운 물살은/새빨간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고요히 흔들어대지만/호흡이 정지된 멈춘 시간까지는 흔들지 못했다/지느러미의 흔들림은 다만 죽은 물살을 소리 없이/가늘게 두어 번 흔들어 댈 뿐이었다//흔들리는 사해의 물/그 그리움이 1cm의 새빨간 금붕어 곁으로 밀려갔고/그 밀려감은 1cm의 거리에서 고요히 끝이 났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는 1cm였고, /1cm 안은 천당이며, 1cm밖은 지옥이었다//물결치는 사해, 그 1cm가 천당이었다
- <1cm> -부분
꿀벌의 낙원은 꽃잎 속이다//-중략-/숨죽인 채 가만히 다가가 /이슬 맺힌 꽃잎을 살며시 들쳐보니/ 꿀벌이었다// 낙원 속에 갇힌 꿀벌이었다
-낙원-부분
오리 궁뎅이만 보면 난 괜시리 서글프다/떠나간 내 여자 궁뎅이가 생각나서 서글프다//-중략-//난 오늘 저녁 왕십리역 근처/ '왕십리 오리탕' 집에서 쓴 쐬주에/오리보신탕을 시켜 먹으면서 나 홀로 울었다/십리는커녕 오리도 못가 발병이 나 있을/떠나간 내 오리를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오리- 부분
위 시편들에서 보듯 시인이 말하는 성과 속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 간격은 1cm 불과 하다. 그런가 하면 십리는 커녕 오리도 못가 발병 나는 거리다. 그럼에도 그 거리는 천당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서 그 거리는 삶과 죽음을 잇는 거리이며 찰나와 영원의 분깃점이 되는 거리다. 결코 가깝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거리이다. 하나의 관념 속 거리이지만 시인의 눈에는 성과 속의 연결된 실재거리일 것이다. 인간의식의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통합비전을 제시한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켄 윌버의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실재'는 단조롭게 뻗어가는 균일한 '실체'의 깊이가 없는 단조로운 평원이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여러 상이하지만 연속적인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현현하는 실재는 가장 낮고 가장 조밀하며 최소의 의식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높고 가장 정묘하며 가장 의식적인 것까지 서로 상이한 등급 혹은 수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존재의 연속체 혹은 의식의 스펙트럼의 한쪽 단은 '물질' 혹은 무정無情의 존재, 비 의식적인 존재라고 일컫는 것이고, 다른 한쪽 단은 '절대정신'(절대영) 혹은 절대신성'(하느님)' 또는 '초의식'(궁극의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시인의 '사라진 얼굴'을 더듬는 동안, 이 글이 생각난 것은 성과 속이 찬연한 이생의 삶 속에서 무한한 우주 속 근원적 자아를 찾는 시인의 시적 행보가 시 전편에 골고루 녹아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시적 행보야말로 본질적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발현이며 시 전편을 응시하는 힘이라 할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응시가 보다 유려한 문장으로 시로써의 미적인 가치마저 구축한다면, 시인의 시적 행보가 한결 빛을 발하리라 생각된다. 다음 시집에서 그 힘찬 행보를 기대해본다.
2008, 창작21 겨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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