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아폴리즘의 삼천대천 세계/ 강영은
-김 동호 시집 “오현금‘을 읽고
1, 오현금의 비밀
김동호 시인의 새 시집<오현금>을 받아들자 시란 영혼의 음악이고 그 중에서도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라는 볼테르의 말이 생각났다. 시집 제목이 <오현금>이어서일까, <오현금>에서 울려 나올 영혼의 음악은 어떤 것일까 기대감에 설레었다. 우선 오현금이라는 시집 제목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인터넷 검색을 클릭하자 오현금은 다섯줄로 된 거문고를 말하며 순임금께서 만들었다고 하는 칠현금의 전신을 뜻한다고 나온다. 중국의 역사 중에서도 상고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만나는 순임금, 그 순임금이 만들었다는 악기가 수세기를 지나 시인에게 시집 제목으로 차용될 때에는 그 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궁금증에 답변이라도 하듯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뼛속의 물음들을 시로
醱酵시켜 보았다
長은 짧고 短은 길어
모양 없는 장단이지만
五絃이 덥석 안아 준다
오곡잡곡밥 먹고 자란
五體 때문일까
칠현금 일곱 줄은
무지개무늬만 날릴 뿐
좀처럼 두 팔을
뻗혀주지 않았는데
-시인의 말- 전문
시의 형태를 취한 ‘시인의 말’에 의하자면 보다 다양한 음률을 지닌 칠현금은 시인이 바라는 고졸한 음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모양 없는 장단의 오현금, 그 투박하고 질박한 음률이 시인이 지닌 영혼의 음률로서 더 적합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을 덥석 안아주는 것은 무지개무늬처럼 찬란한 음을 울려내는 칠현금이 아니라 다섯줄에서 울려나오는 음감인 것이다. 그 이유를 시인은 오곡잡곡을 먹고 자란 오체 때문이라고 한걸음 물러서서 설명하고 있지만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인 오행의 비밀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으로 들린다. 현금, 다시말해 거문고라는 악기는 국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악기이다. 지금은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 만든 장방형의 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로 이루어진 거문고를 주로 사용하지만 본래 중국악기인 칠현금을 왕산악이 개조하였다 한다. 독주 악기로서 쓰임새가 출중한 거문고, 지금에 상용되는 육현금이나 그 원조인 칠현금보다 원조의 원조 격인 오현금에 시인의 눈길이 간 것은 우주 만물, 자연현상, 그 모든 것의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데에 몸과 마음의 음률을 실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저녁식사 대접 끝에 거문고 산조를 감상한 적이 있었는데, 다 듣고 나더니 '옆방에서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 같다.'는 감회를 피력했다고 한다. 거문고 소리를 흐느끼는 소리로, 더구나 듣고 있는 바로 그 방이 아닌 옆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로 들었던 것인데, 거문고소리의 묘한 경지를 적절하게 감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 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소리만 들으면 되지만, 거문고나 가야금은 나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 나지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곧 물리적 소리가 스러지고도 그 여운이 가서 닿아 불러일으키는 심정적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시집 속에 수록된 시편들의 배열이 각 부마다 여섯 개의 연작시와 나머지 4행 시편들로 이루어진 점은 바로 그 물리음, 심정음의 간단성, 간헐성의 음률을 고려한 점으로 여겨진다. 평론가 유성호는 이를 두고 '생의 형식'이란 말을 쓰고 있으며 이러한 시적 배열을 '생의 형식에 대한 근원적 탐색'이라 평하고 있다. 시집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특징인 독특한 시의 배열과 형식 속에서 시인의 작중 의도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 시인이 오체를 끌어안는 오현금의 음률, 즉 뼛속의 물음들이 그 구성 원리 속에서 어떻게 발효되는 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는 시감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편을 더듬어 본다
2, 하늘이 준 언어
김동호 시인은 충북 괴산 출생으로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셨으며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재작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계신다. 시집으로는 ‘바다’, ‘꽃’, ‘노자의 산’, ‘한 쌍의 새가 날아 간다’ 등 9권의 시집을 상재하셨으며 1988년 성균문학상, 2007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특히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은 문학아카데미에서 시인들의 전범이 되는 시작활동을 해오신 시인을 뽑아 기리는 의미 있는 상으로 김동호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시인들이 뽑아주는 상이라 더욱 기쁘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때의 수상작인 ‘수리산 연작시’에 대해 시인은 인터뷰대담에서 매일같이 수리산을 오르내리며 산과 인생을 생각하다보니 꼬리가 길어져서 쓴 시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생태계 전체에 대한 통합적인 유기적 안목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땅을 법도로 알고 ,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다’는 노장적 사유가 바탕이 되는 예증은 본 시편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나팔꽃의 넝쿨손을 통하여 하늘을 도의 법으로 생각하는 시 한편을 보기로 하자.
???을 머리에 이고
돌길 지나 들길 지나 물굽이를
몇 번이고 넘고 돌아
사십 고개 마루턱에서
고향집 저녁연기 사이로
우연히 바라본 담벼락의 나팔꽃!
?모양의 나팔꽃 넝쿨손이
나를 잡고 놓지 않는다
?도 언어이다
하늘이 준 언어이다
짐승에게 없는 인간의 언어이다
-"물음" 연가 2 중에서-
이 시는 연작시의 형태를 위한 시편 중의 두번째 시이다. 나팔꽃의 넝쿨손 모양을 보고 하늘의 준 언어임을 감지한 시인은 그 형태를 띠고 있는 ?을 시적 원동력으로 人法地 ,地法天 , 天法道, 道法自然의 세계를 펼쳐나간다.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언어는 하늘이 준 언어로써, 삼라만상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자연의 언어이기도 하다. 때문에 시인에게 있어 ?라는 의문부호는 하나의 독립어로 시인의 시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언제 어디서나 맞닥뜨리는 ?는 그러므로 기호가 아니라 언어이다. ?가 없었다면 시인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도, 아무런 의미 없이 통과해나가는 하나의 지점에 불과할 뿐, 나팔꽃의 넝쿨손처럼 뻗어나가는 생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꽃피우지 못했으리라, 그렇기에 시인은 ?에 대해 끝없는 사랑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인의 ‘물음’ 연가는 ?이 ?을 낳고 낳는 순환의 궤도 속에서 자연스레 우주만물을 아우르며 발효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믿는다. 누룩곰팡이처럼 발효가 잘 된 것들은 몸을 튼튼하게 하는 유기체의 역할을 한다. 또한 발효가 잘된 시들은 한편 한편이 무르익은 향기를 풍길 것임에 틀림이 없다.
3, 4행시의 아포리즘
시집 <오현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4행 시편들이다. 각 부의 맨 앞에 일련의 번호로 이루어진 한편의 시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짧은 4행 시편들로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시인의 의도를 드려다 보게 하는 방법적 전략으로 보여진다, 각 부의 첫 시에 풀어쓰기 형태의 긴 시를 배치하고 그 시편 하나가 주축이 되어 나머지 단가의 시들을 이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미지의 형상화에 대한 문제에 앞서 시적 진술의 효과면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적 장치로 보여진다. 한편의 장가와 여러 편의 단가를 통해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아포리즘 효과가 인상적이다.
왠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바다엔 왜가 없다
사랑이 ‘왜’를
다 잡아먹은 모양이다
. -‘왠지는 모르지만’의 전문
겹겹의 산이
겹겹의 꽃잎이네
가장 큰 뒷산이
가장 작은 속잎이네
-‘겹겹의 산’ 전문-
짧은 두 편의 시이지만 역설과 풍자의 미를 잘 살려주는 아포리즘이 선명하다. 사전에 의하면, 아포리즘이란 신조나 원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 또는 널리 인정받는 진리를 명쾌하고 기억하기 쉬운 말로 나타낸 것이라 되어 있다. ‘사랑의 바다엔 ‘왜’가 없다. 사람이 ‘왜’ 를 다 잡아먹은 모양이다‘ 라고 짧고 간명하게 기술된 시 속에는 삼라만상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해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으며 산이 포개어진 모습을 겹꽃으로 이미지화한 시편 속에서는 가장 큰 산이 가장 작은 속잎이라는 대귀법을 통해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물화론 적 사상이 심도 있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짧으면서도 간결하게 단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시가 언어로 씌어진 미적 재현물, 혹은 미적인 구축물이라고 한다면 최대한 짧은 시행 속에 미적 가치를 드러내려고 하는 시인의 의도가 4행시 형식을 통해 탄력적이면서도 설득력있게 전개된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편이라 불리어지는 일본의 하이쿠(홋쿠[癸句]라고도 불려진다)도 처음에는 전통적인 단카[短歌]라는 시의 처음 3행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4행시의 저의가 만만치가 않은 듯 여겨진다. 원래 하이쿠의 형식은 주제 선정에 있어 비록 암시적이지만 분명한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4계절 중의 어느 한 계절을 암시하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묘사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후에 주제 선정 범위가 넓어졌고 가능한 한 가장 적은 단어수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없는 한계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어서 예술로서의 시의 역할에 대해 언어적 유희면이 강하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라 하겠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4행시를 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생각은 시인의 시편들을 읽어가는 도중에 생긴 나의 자문자답이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시편들(물론 그 이전에도 4행시의 여러 방향성을 설정해 탁월한 시적 업적을 남긴 김영랑, 강우식과 같은 시인들이 있었지만)을 읽어가다 보면 4행이라는 틀 속에 시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가두어 놓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시의 모법을 펼쳐온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의 틀을 개선하고 도그마에 빠지기 쉬운 종교와 맹목에 빠지기 쉬운 과학을 연결할 수 있는 시, 논리에 빠지기 쉬운 철학과 색맹에 빠지기 쉬운 예술을 이을 수 있는, 참다운 시를 찾는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한 시인이 자신의 다짐을 모색하려는 시도라 보아도 좋을 듯 여겨진다.
5, 언어적 유희의 감흥
몇 편의 시를 더 감상해보도록 하자
사랑은 둘만 있고 싶어 한다
둘만 있는 곳이 어디일까
외진 곳? 떨어진 곳? 자물쇠 속?
아니다, 그 곳은 ‘곳’ 이 아닌 곳
- ‘둘만 있고 싶다’ 전문-
작지만 큰 돌
깨질수록 커지는 돌
무수히 개져서
더 이상 깨질 것이 없는 돌
- ‘작지만 큰 돌’ 전문-
두 입술 뜨겁게 포개있는 것을 보고
한 치매 노인이 말한다
“두 잎 포개 있다”
- ‘두 입술’ 전문-
허물 세 번 벗는다
세상이 배꼽일 때
눈물이 물일 때
죽음이 렌즈 일 때
- ‘선탈’ 전문
시인의 언어적 감각은 읽는 사람들을 절로 유쾌하게 만든다. 즐겁게 한다. 마치 고무공이 통통 뛰어오르는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동시에 삶을 투철하게 응시하는 직관과 맞물려 투명한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다시 말해 도도한 감흥이 아포리즘과 만나 진실을 토로하기도 하고 명확한 신조나 삶의 원리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게 시인의 시세계에 침잠해 있는 동안 문득, 오현금의 가락 속에서 원무를 추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바람이 물결을 깨운다/ 물결이 바람을 깨운다/ 햇살이 이슬을 비추고/ 이슬이 햇살을 사방에 전한다(‘원무’ 전문)처럼 시인의 시적 원무를 접하고 있는 동안 시인의 시어들이 과일 향으로 타는 악기가 되어 상쾌하게 내 마음을 넘나든다. 해를 업고 가부좌를 튼 시인은 아마도 불가에서 말하듯 스스로의 그림자를 점점 키울 것이다. 그 그림자 속에 들어앉은 시의 삼천대천세계는 참으로 얼마만한 장관을 이룰 것인가. 생각만해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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