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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해설

회임, 영원한 낙원을 꿈꾸다 -김 여정 시집 <눈부셔라, 달빛>

by 너머의 새 2015. 9. 7.

회임, 영원한 낙원을 꿈꾸다
             -김 여정 시인의 시집 “눈부셔라, 달빛”을 읽고 / 강 영은



1, 젖과 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목련 꽃망울이 은은하게 마당을 밝혀드는 봄날, 김 여정 선생님의 시집 <눈부셔라, 달빛>을 받아들었다. 달빛처럼 목련 꽃잎처럼 날아든 시집을 봄날을 읽어내듯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든다. 시집 속에서 얼핏 보이는 '물속의 신전' 인 불기둥'과 '눈부신 솜털구름' 의 구름 한 자락이 우선 시선을 잡아끈다.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냈던 하느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나는 그 두개의 기둥에 이끌려 가나안 복지로 향하듯 천천히 시집 속으로 들어가 본다. 눈부시게 새겨진 달빛의 광휘를 더듬기 전에 <김여정 시 전집>에 수록된 한 편의 시가 문득 떠오른다. 꽃이 화안하면/ 꽃의 그늘이 안보이고/ 꽃잎에 맺힌 눈물은 안보이고/ 눈물에 비친 꽃의 길은 안 보이고/ 꽃만 보인다/ 꽃의 탈만 보인다/ ( 꽃의 탈 전문)라는 시 구절이다. 꽃그늘 아래 맺혀 있는 이슬방울을 보지 못한 채 꽃의 환한 자태에만 눈부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다. 지면에서, 혹은 먼발치에서 뵙던 시인의 넉넉하고 풍성한 시의 향기를 흠모했을 뿐 그 속에 담겨진 시인의 눈물과 눈물에 비친 길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내가 가나안 땅의 유칼리나무와 같이 푸르청청한 시편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낼지 우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시집의 첫머리에 씌어진 自序, '세월의 강물 위를 흘러가는 내 사계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을 집어내어 조각보를 만들어 본 작품이라는' 시인의 말에 의지하여 잎맥 같은 시의 줄기라도 더듬어 볼 요량으로 용기를 내 본다.

시집은 모두 4부로 나눠져 있다. '물속의 신전'이라는 부제를 단 1부에는 17편이 들어 있으며 시인의 내면 풍경이 자아와 세계와의 합일을 이룬 시편들로 재현되어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아침 이슬이 하는 말'을 제목으로 내세운 2부에는 18편이 들어 있으며 자연과 일상을 모티프와 오브제로 삼은 시편들이 청량 감 있게 그려져 있다. 3부인 ' 눈부신 날에'는16편이 들어 있으며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해부하거나 초연한 자세를 정감 있게 풀어나간 듯하다. 4부에 들어 있는 남강 시편 8편은 <수필이 있는 시>에 게재되었던 20회분의 작품 중 11번 째 시집에 수록된 12편을 뺀 나머지 시편들로서 시인의 고향인 진주를 다양하게 묘사한 시편들이다. 그래서인지 열두 번째로 출간 된 이번 시집 속에는 봄여름 가을 겨울의 풍정을 노래한 사계가 들어 있으며 조각보처럼 면면히 누벼진 일상도 적잖이 들어 있다.

내 나이 73세/ 이참에 내 인생의 집도 수리하기로 했다/ (시 '웬 별말씀' 중에서)가 아니었다면 겉보기에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젊고 정정하신 시인의 시력이 1968년 문단에 처음 나온 해와 견주어 계산해보면 만 사십 세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사십은 불혹이라고 했으니 이 말은 四十而不惑,, 즉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시력이 사십 세에 이르렀다는 건 시를 쓰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갈팡질팡 하거나 정신이 흐리는 일 없이 한 경지를 이룬다는 말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시의 불혹을 넘어서 지천명을 향하는 시적 경지, 시적 세계의 완성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들어섰음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40여년의 시작활동 속에서 12권의 시집을 상재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단행해내듯 끊임없이 고난과 질곡의 삶을 시적 세계의 탐구를 통하여 엑소도스를 감행해 내야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가나안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이제 그만 나를 무죄 석방해주려는 그대여
나에게 종신형의 유죄를 언도해다오
내 죄 중하고 중한 도둑의 죄
어찌 무죄 석방을 바라리오
어릴 적엔 벌써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비단 헝겊을 훔쳐 인형을 만든 죄
더 자라서는 벌 대신 아카시아 꽃을 따 먹은 죄
가을 지붕 위에 내려온 잘 익은 별 떨기를 몰래 먹어치운 죄
보름달을 덥석 불어 반달을 만든 죄
더 커서는
유부남의 미루나무를 한 밤 중 남 몰래 껴안고
가장인 장년의 느티나무를 가슴 할랑 거리며 사모한 죄
다 큰 처녀의 몸으로
야심한 밤에
북두칠성을 품에 꼬옥 안고 있는 강줄기를 잡아끌고
울울한 대나무 숲으로 숨어든 크나큰 죄
그대가 빤히 알고 있는 죄목이 이 뿐이 아닌데
무한한 관용의 그대여,
제 발 이중죄인에게
무죄 언도는 사형선고라도 더한 고통이니
종신형에 묵어서라도
더 죄를 지을 수 있는 유예의 시간을 허락하지 말아다오
- '언도' 전문-

이 사에서 보듯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합일을 이루는 세계에서 스스에게 중죄를 언도하는 일인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려 죄인 되기를 자청하는 모습이야 말로 무죄를 선고받기를 바라는 뻔뻔한 모습보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며 솔직한 태도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피력하는 역설적 고해성사를 통하여 누구보다 순수하게 신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의 탈을 벗어버리는 방법이 가나안 땅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또 다른 시편인 '조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시사철 다른 빛깔 다른 음성으로 흐르고 피어나는 강물과 사랑하는 너희들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이들과 시시때때로 알고 모르는 죄를 놋그릇 닦듯 씻어주시는 분께서 항상 함께해주셔서 내 속의 병이 유리알처럼 맑아졌음 그 일체를 기억하지 말며, 어쩌면 고백 같기도 하고 당부 같기도 한 이 구절은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시인의 삶이 이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음을 증명해주는 증빙서가 아닐까 한다.

2, 완경의 아름다움

여기서 김 여정 선생님의 시적 여정을 살펴볼까 한다. 성균관대 국문과 와 경희대 대학원원 국문과를 졸업하신 선생은 앞서 말한 대로 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다. 시집으로는 <화음> <해연사< 사과들이 사는 집> 등 다수가 있으며 시선 집으로 <레몬의 바다><그대 꿈꾸는 동안>< 흐르는 섬>을 펴내셨다. 그 외에도 다수의 수필집, 시 해설집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셨고 대한민국문학상, 월탄 문학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남명문학상, 동포문학상,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정문문학상 등의 눈부신 수상 경력을 갖고 계시다. 40여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속에서 시인의 시작활동이 이루어낸 성과는 여류시인의 범주를 넘어선 열정과 삶에 대해 어머니와도 같은 원초적인 모성, 그리고 관조의 미학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적 여정은 어머니로서의 완경, 여성으로서의 완경, 인간으로서의 완경에 다다르는 삶을 수태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또 대상화시키는 열정적인 몸짓은 스스로가 대지의 어머니며 근원적인 모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현대문학사가 발간한 시집<화음> 속에 들어있는시편 '성냥개비'를 보면, '성냥개비로/ 꽃이 피면 피는 순간에/ 잎이 지면 지는 순간에/ 불붙는 감성의 불길에 싸여'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보듯이 시인의 감성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꽃을 피워내듯 수 백편의 시를 잉태하고 또 낳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를 다음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다.

수개월 전 한 밤중에
강 건너 예봉산이내 몸을 덮치더니
벌써 입덧이 시작 됐네
그 좋던 입맛이 삭 변해 버렸어
틀림없이 임신이야 임신!
내 속이 출렁출렁 파도치기 시작했어
내 속에서 배롱나무 동백나무 가문비나무 뿌리가
벌써 오래전 꿈을 버린 내 살을 아프게 찌르고 있어
수확 끝낸 내 들녘 흙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온갖 씨앗들을 연대하여
내 오관을 간지르고 있어
틀림없이 임신이야 임신!
누가 뭐라해도 증후가 그래!
내 쇠락한 세포들이 봄눈을 트기 시작했어
버들개지 보얀 털이 보얀 쑥 순이
보얀 산안개가 강 안개가
내 정신을 먼 하늘 저 너머 만큼이나 아득하게 하고 있어
아, 내 심장에 복사열이 전광석화로 번지고 있어
그날 밤 나를 덮친 예봉산
이제 멀쑥하니 물러서서 딴청 부리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끄러운지 먼 산에 복사꽃 만발하고
산골짝에 물소리 조심스러워
나도 그만
우량한 봄을 회임했음을 자랑하기로 했어
-내가 임신을 했나 봐, 전문-

임신은 기능상 여성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며 영원불명의 이름, 어머니로서 탈바꿈을 하는 분깃점이기도 하다. 거기에다가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임신을 하다니! 이처럼 초극의 완경 속에서 보여지는 성적 에너지는 그야말로 시인이 지닌 열정의 또 다른 분신이며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 생명력의 건강한 힘을 시인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에서 나는 시적 완경의 경지까지 보고 만다. 완경이란 제1의 번식 기를 마치고 새로운 인생인 제 2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한 가지 임무를 훌륭하게 마친 것을 말하는 산부인과의 용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시적 완경이란 물리적, 자연적인 상황을 초월한 에너지의 또 다른 원천이며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완숙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말함이다.그야말로 달관과 관조, 해학이 어우러져 완경기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다. 시인의 모습에 대해 강 우식 시인께서 <문학과 창작, 2007, 겨울호>를 통해 시를 헌사한 것이 마치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는 시 같아 그 내용을 일부 잠깐 소개하겠다. 한 여자가 끝물에는/ 목 백일홍이 되어서 그 한 나무 가지로/ 등을 구부리고 불을 못 이겨 /등 욕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메밀꽃 핀 들판 같은/ 흰 등판의 여자/그 등 위로 툭툭 살을 치며/ 물줄기가/ 한 번씩 퍼부을 때마다/ 흐득흐득 흐느끼며/ 오륙십 년 전의/ 소녀로 돌아가고 있다/ 그 흐느낌 속에는/ 온갖 잡 때를 다 씻어내는/ 시원하다는 말 한마디도 있었다. 아 이 대목에서 저 늙은 목 백일홍이/ 붉게 꽃 피운 모습은 결가부좌를 풀고/ 증손녀 같은 소녀를 껴안은/ 천연이기도 했다.( 남정 사 목 백일홍/ 강 우식 ) 붉게 꽃 피운 목 백일홍에게서 온갖 잡 때를 다 씻어내는 완경의 아름다움을 보듯 나는 그 목 백일홍으로 묘사된 시인의 모습에 그만,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숙연해짐을 느낀다. 시인은 그럼으로써 가이아처럼 대지의 여신의 된다, 만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3,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는 오래전에 회복되었지만 지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포연더미 속에서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곳이 되고 말았다. 가나안 복지는 이제 우리들의 눈물 속에서 이상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때문에 시인은 만물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가나안 복지를 대신 한다. 만물의 어머니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세계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나는 문득 <정쟁과 평화>에 생각이 붙잡힌다/ 평화로운 가족과/ 전쟁의 비극 속에서 비탄에 빠져 있는 가족들/(장마 뒤의 풍경 중에서)에서 아픔을 노래한다. 또 (아침 이슬이 하는 말)에서는 흰 뿌리 드러난 상처의 풀잎들/ 보이지 않게 치유하는 사랑의 손길/뜨거운 눈물의 기원/ 이라고 치유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점,
하나의,
외로움,
외다리로,
선,
생의 절대 고독,
-점 하나의 외로움- 중에서

외다리로 서야만 생이 지탱되는 황새를 보고 점 하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근원적인 고독을 그려내기도 한다. 벌레소리 새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로 우리에게/ 귀 띰 하는 그대의 묵언의 교시에/우리의 삶의 진정성을 회복함이여/(생명들의 교향악장)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삶의 존귀성을 부르짖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은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만물과 세계를 아우르는 모성 성을 보여준다. 황폐화된 가나안으로 우리를 인도 하는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을 지닌 자신의 몸을 열어 세계와 자연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내 치마폭은 하늘이었다
아니 바다였다
아니 강물이었다
나는 그저 동공을 크게 열고
하늘을 있는 대로
바다를 있는 대로
강물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들였다
다 빨아 들였다
익은 별이
둑에 나란히 앉아
우리 모녀의 각기 다른 생의 껍질을
탁탁 깨부수며
각기 다른 하늘의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 둑에 앉아- 중에서

하늘이며 바다며 강물이기도 한 어머니, 치마폭을 펼쳐 삼라만상을 끌어안는 어머니, 젖과 꿀을 내어주는 어머니, 그 절대명제 앞에서 누대의 삶은 회임을 통하여 이어져 내려간다. 시를 수태하는 것도 회임을 통하여 생명력을 발휘 하는 것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니 시집 전편에 흐르는 시인의 젖과 꿀이 내 시의 자양분이 된 듯 허기진 마음이 든든해진다. 예봉산이 덮치자 우량한 봄을 회임하신 선생님, 녹음이 덮치면 또 어떤 싱싱한 여름을 낳으실지 벌써 기대가 된다. 후배시인들에게 젖과 꿀을 먹여주시는 아름다운 모습 아무쪼록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한 송이 꽃이시길 기도해 본다. 창밖을 내다보니 봉오리 졌던 목련 꽃이 날아갈 듯 하늘거린다, 만개한 봄이 시작되나 보다.


문학과 창작, 2008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