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남아있음의 미학 /강영은
- 채규판시선집"저 소금장수의 눈" 해설
한국 시단의 중진이신 채규판 시인의 원고를 받아들고 옥고에 시선을 집중하는 동안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는 <W.셰익스피어>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움직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대붕의 거대한 날개로 상상력을 구가할 뿐 아니라 심화된 사유를 통하여 촘촘히 짜여진 시적 공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밀도 깊은 시적 공간에서 시인이 재현해내는 이야기는 시인의 삶을 관통해 온 두 도시, 군산과 익산에 인접한 신성리 갈대밭(우리나라 4대 갈대밭 중 하나)의 바람소리를 듣게 하거나 금강하구로 무리 져 날아오는 철새 떼의 날개 짓을 보는 것처럼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해준다. 금번 상재한 시선 집 속에서도 바람과 새는 주요 모티프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 된다. 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고 말한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J.C.F.실러>의 말처럼 바람소리 새소리를 제 몸에 깃들여 살아온 시인이기에 가능한 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진솔한 시세계는 공자의 시편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시를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고. 어긋나지 않으며, 치우침이 없다’는 그 세계는 40여년이라는 세월을 오로지 문학만을 추구한 문학자로서 정진해 온 결과이며 후학을 양성하여 숱한 문인들을 배출한 스승의 면모를 여실 없이 보여주는 일이기에 엄선한 시편들을 골라 시선집으로 다시 선보이는 의의는 자못 크다 하겠다. “시는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오.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제2의 준비다. 누가 만약 나에게 시를 쓰지 말라고 한다면 분노로 저항할 것”이며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쓸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바 있다. 이 시선집을 통하여 세월의 깊이만큼 농익은 언표들을 만나고 시인이 걸어온 시적 행보를 다시 밟아보는 기쁨 또한 크다고 할 것이다.
1, 바람 속에서
시인은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인이 등단한 1960년대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근대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했던 어려운 시기였다. 분단 상황 아래 이러한 과제를 추구하는 것은 4,19나 5,16 같은 시대적, 정치적 모순에 대한 폭발과,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라는 이념적 목표와 근대화라는 현실적 목표가 충돌하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어야 했던 시대상황은 1960년대 시단에 여러 가지 흐름을 가지게 하였다. 하나는 현실과의 부딪힘 즉, 상황에 대한 시적 응전 방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생명, 서정으로의 회귀이고, 마지막 하나는 예술로서의 언어 문제에 대한 깊은 탐구가 그것이다. 흔히 참여시, 전통적 서정시, 후기 모더니즘시 라 불리웠으며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둔 참여시와 달리 전통적 서정시와 후기 모더니즘시는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고, 예술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참여시와 구별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등단한 시인의 등단시를 우선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숱한 지느러미로 꽉 찬 내부에 섰다.
그 중에서도 길이 잘 든, 불티가 쌓이는 광장이다.
힘이라던가, 아름다움이라던가, 하는 사랑의 의지들을
나는 가끔 손에 담는데
그것들은 곧, 무수한 출범의 까닭을 만든다.
또한, 톱니가 많이 난 가슴을 갖고 있어서
그 가슴은 피로할 줄을 모르며
산란하는 철이 아니래도
항시 별이 든다.
그러므로, 바다의 난간을 좁히며 열리는 문,
트이는 빛을
아, 가장 가까운 둘레에서 시작하는 소중한 작업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수런대는 낙과의 틈을 비집고, 비로소 오는 풀씨의 새벽이여.
찰나를 잇는 징명한 음악이 기려울 때,
네 귀 반듯한 티켓을 주고, 행복을 살수는 없을까 고 조바로울 때
눈물 알의 표피에 접히는 참 건강한 안식이여.
純히, 꽃잎 새와 꽃그늘의 반조 같은 것이
안으로 물살 져 흐르는데
조리개를 통해 빛나는
환희의 원시림,
밀밭이 넘치는 행길을 건너서
아니면, 부서져 나간 첨탑 모서리로부터
바람은 나린다.
마침내, 칭칭 감아 조이는 비옥함 속에 서서
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친구여,
일찍이 창을 열고 조금 잡아넣었던 신의 오열은
무슨 색조의 바람일까, 고.
그 바람의 손짓은
불모이기를 거부하는 나의 온 몸의 털끝에 숨 쉰다.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고 미소한다
숱한 지느러미와, 길이 잔 든 불티의 결집에 갇혀서
조금씩 알아져 가는 생명의 始源을.
-<바람 속에서>전문-
이 시를 분류하자면 후기 모더니즘 계열이 아닐까 한다. 리리시즘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와 달리 언어의 탐미적 구조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참여시와 순수시를 동시에 비판하는 것도 이처럼 시적 언어의 예술성에 대해 깊이 탐구해온 시인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에 대해서는 1950~1970년대의 한국시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시의 사상적 체계를 정리한 채규판 문학전집을 통해 기 확인된 바 있다. 위 시에서 보면, 바람의 즉자적 세계인식을 대자적 세계인식으로 치환해내는 은유적 메타포와 사물의 감각화는 현재적 시점에서 읽는다 하여도 조금도 손색없는 모던한 감각과 세련된 언어 구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을 숱한 지느러미로 느끼는 촉감과 불티가 쌓이는 광장으로 보는 시각과 수런대는 낙과의 틈으로 느끼는 청각, 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는 시인의 감각은 경이의 지경을 넘어 신의 오열과 생명의 시원을 노래하고 미소하는 대자즉자적 세계인식으로 확대해나간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시의 언어에 대해 이처럼 노련한 기량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만의 시의 우주를 이미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바람에 대한 세계인식은 금 번 상재한 시편들 속에서는 하나의 은유로 내재화 되거나 대자적 세계관으로 이전 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마침 信號機와 한데 엉켜서 산다.
仙人掌의 가시를 뽑아내며
아플거라며
아플거라며
읊조리는
반복의 아픔.
차마 못 버린 아쉬움 때문에
줄기줄기 흔들리는
꽃의 原色을 파내면서
아아,
喊聲이 역겨운
바람을 마신다.
달리는 소리,
떠나가다 되 와서
엎으러지는 소리,
힘 빠진
驛舍에
다만 새길 수 있는,
지금 막 旗幅이 되고 있는
적당한 손짓,
손짓 속에 갇혀서
죽지 않고 있다.
- <驛頭에서>전문-
이 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다. 신호기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깃발이 올라가고 차단기가 열리는데 시인은 아마 그 깃 폭 속에 들어 있는 바람을 주시했던 것 같다. 이때의 바람은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별로 표상되는 바람은 “달리는 소리./떠나가다 되와서/엎으러지는 소리/”로 우리 앞에 한 폭의 추억으로 펄럭인다. 이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단언컨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별이란 불가피한 명제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구별을 떠나야 하는 원형질 적인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이별의 정리는 쉽게 떠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차마 못 버린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때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어서 가라고 손짓하지만 손짓 속에 갇혀서 죽지 않는 바람처럼” 남게 되는 것임을 그려내는 시인의 언표는 삶의 원형질을 유출해낸다.
스산한 바람에 갇혀/내 이웃은 떨고 있다.//塔身을 돌면서/비로서/울리는 風磬,/山내음 같이 떨고 있다.-<塔身을 돌며>부분
사막은 한줌의 햇살을 퍼 쏘아댄다./山기슭을 돌아가며/허연 먼지가 쏟아지며/原始의 風俗을 다시 끄집어 내며/바람은 메마른다.-<로키산맥을 지나며>부분-
십일월의 차가운 바람이/정인가/핏물로 고이는 사뭇 달아오른/한숨인가.-<노상에서>부분-
손에 잡힐 듯/끝내는 부서지고 말지만/가로수를 끼고 부서지는 시름과 같이/나의 꽃나무는 바람에 잔다./산새도 마을을 비껴 울고 있다.-<山村>부분-
시대적 바람 속에서 시단의 새 바람과 함께 출발한 시인은 위에서 보듯, 바람의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이처럼 다양한 바람의 모습은 시인이 시를 쓰는 시점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며 그 양태는 바람에 대한 즉자적 세계인식이 다른 세계를 만나 합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를 재현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2, 떠남과 남아있음의 미학
시인은 2000년 <한국문화관광연구지>에 발표한 "고창과 미당 서정주의 미학" 에서 다음과 같이 기슬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당대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이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의 조치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시는 시대 쪽에서보다 사람 쪽에서 오히려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 쪽에서 그 시대의 규정의 방법이나 해석의 결론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이 공통질서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이나 정신체계를 마름하게 하고 유도하게 함으로써 그 시대의 다음에 올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전제이유를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전통의 객관적 확립을 진정한 문학행위로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말을 나름대로 풀이하자면 "자기 전통의 객관적 확립"을 수립하는 것이 시인이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그 결과물로 시라는 언어의 결정체를 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시인마다 "자기전통의 객관적 수립"을 위해 각기 추구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시인은 자연사물을 자주 등장시킨다. ‘시’를 인간의 가장 절친한 동반자로써 자아와 세계가 합일을 이루는 하나의 매개체적 존재로써 자연 사물을 차용한다는 것은 시인이 그의 말마따나 시와 편안한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사물자체에 존재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자체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사물을 자신의 내면을 심화시키는 대자적 존재로 은유화 시키고 친화력 있는 존재감의 표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시작법은 “자기전통의 객관 적 수립”을 위한 시적 방편으로 보여진다.
사물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물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표상 중에서 시인은 바람 외에도 새, 혹은 꽃, 기차 등을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들은 각각 불거나, 날아가거나, 피어있거나, 떠나가거나, 하는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떠남과 남아있음의 의미를 표상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은 통하여 시인이 구축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세계이다. 시인의 에스프리가 이들과 결합하여 떠남과 남아있음의 의미를 한층 심화 확대시킴을 볼 수 있는데 각각의 존재에 대한 에스프리를 미학적으로 성취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시를 최고의 시로 평가하고 있다” 고한 시인의 발언은 그것을 증명하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이 길목을 따라가면 꿈이 있다고 하자
이 길이 끝나는 곳에
우리들의 기억이 있다고 하지만
잡힐 듯 닿지 않는 생각 때문에
나는 몹시 춥다.
흔들리며
노래하며
가끔 흐느낌을 뿌리면서
꽃잎이 쏟아지는
꽃의 그늘 밑을 개미처럼 기어가면서
거기서 달려오고 있는 기차를 본다.
터지거라
화산이 뜨거운 언어를 뽑아내듯이
폭발하라.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많은 것들 때문에
자꾸만 오늘을 잊어버리면서
겨우 꽃잎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
나의 지금은 몹시 춥다.
-<꽃과 철도>전문-
새가 우는 길목만 찾아다닐 수 없다.
아무리 오래 된 생각이라 해도
사람인데
휴지로 닦아낼 수는 없다.
어둠이 깔리든 말든
밤의 아래 서서
스르륵 지나가는 그리움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손짓도 그렇고,
우는 시늉도 그렇고
생각하면, 지금서 생각하면
알토란보다 더 보얀 살빛인데
나는 그를 놓아 보냈고
그는 멈칫멈칫 걸어서 갔다.
남들은 이별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사랑인가 했다.
후르륵후르륵
풀잎으로 깨는 피리 소리라든가
아마, 그런 소리처럼 덩달아 허물어지는
나의 오늘의 노래라 하자.
말갛게 피어올라라.
비로소 열리는 망각의 수렁에 빠져
기쁜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그냥 날뛰거라.
한가로운 시간마다 들이닥치는
어쩌다 들이닥치는
한 가닥 빛깔을 기다리면서
더러 잡히리라,
꼭 쥐어지리라.
이 생각 저 생각을 뒤척거리면서
오늘은, 밤이 새지 않는다.
-<이 생각 저 생각>전문-
이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꽃과 새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것들에 대한 즉자적 세계인식으로써 존재를 증명해내거나 존재에 대한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심연 속의 대상, 즉 대자적 존재로써의 대상이다. 그들은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떠나갔거나 떠나보낸 존재이다. 어딘가에 피어있을 꽃과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새는 떠나보낸 것이지만 ‘어디’라는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비단 이 두 시편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세계는 시인의 근원적인 모습이 지니고 있는 공간이며 시인이 경험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떠남과 남아있음의 괴리 속에서 시인의 슬픔이 탄생하고 그리움이 소생한다. 이처럼 떠남과 남아있음이 공존하는 현실의 아이러니는 시인으로 하여금 넘지 못할 슬픔의 세계이며 닿고 싶은 공간이기도 할 터이다. 관념의 공간을 현실로 불러오기도 하고 현실의 사물 속에 재현되기도 하는 이러한 지점은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공간이다. 시인의 시편들은 이처럼 선 관념 후 사물, 혹은 선 사물 후 관념의 지점을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발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떠났지만 남아있는, 혹은 남아 있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시적 발화의 근원적인 현상을 아이러니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3, 들라크루아 풍의 기행시편
시선집의 3부에는 시인이 유럽, 아프리카, 남미, 북미 등을 여행하며 쓴 <세계 기행시>에서 발췌한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숲은
깊고 어둔 門이다
幻戲가 있고
새들의 回轉이 있다.
울창할수록 숲은 깊고
江은
누렇고
한 줄기 黑暗이었던 것을.
비탈진 길에서 줍는
土俗의
긴 손톱,
때가 찌든
燐憫을 만난다.
낳고 슬어지고
무시로 마주치는
攝理,
- 아마존의 欄干에서
門은
강으로 나 있다.
-<아마존 7- 숲에서>전문-
死神을 휘감아 올린 바람은
난간에 부딪치다가는
몇 개의 古典을
내려 놓는다.
물줄기마다
희게 부서지는
권태의 끝,
까맣게 그을린 파수파티나의 다리에
연기처럼
暴惡이 서린다.
인종의 그루터기에 부대끼며
매달려
파동치는
바그마티의 江,
그 숨결을 주어 담으며
절망도
내일도 있지 않다.
번뇌와
無念으로 짜여진
우리들의 세월,
저기 뿌려지는 숨 막히는
숙명을 아는가,
한 움큼의 砂石이 쓸어안고 있음을.
병마에 허덕이며
버티며 선다.
열반을 잉태하면서
잡는
神의 가멸한 손.
바람은
여기서 불지만
죽음의 영전에 파묻히면서
새의 날개가
참 처연하다.
-<파스파티니의 다리>전문-
여행이란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지구 곳곳에 숨 쉬는 숨은 그림을 찾아서 수많은 문을 통과한 시인은 섬세한 필치로 그 나라의 문화유적 및 자연의 특색을 절묘하게 잡아내어 한 편의 풍경으로 완성시킨다. 이러한 묘사는 마치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던 ‘들라크루’와의 화풍에 비견할 수 있다. 시인의 시편들은 규격화된 틀에 엄격하게 묶여 있던 당대의 고전주의 화풍과 대치되는 낭만주의적 화법처럼 자유스럽고 활달한 사유를 풍경 속에 덧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디카시’의 <사색기행, 나는 이런 여행을 해왔다>라는 책에 보면 “여행의 본질은 발견이다. 전혀 새로운 것에서 발견하는 내 자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 일상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체험들 속에서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을 탈피한 여행, 그 과정에서 얻는 모든 자극 우리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뿐만 아니라 지적, 정서적 변화를 일으킨다. 사람은 바로 이런 변하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존재다 ” 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을 풍성하게 살찌울 수 있는 여행, 그중에서도 세계 각국의 나라를 돌아보는 것은 시인에게 분명한 축복이며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 속의 풍경이나 여행 중에 느꼈던 감정들을 시로 형상화 한다는 것은 ‘시’라는 괴물에 오로지 관심을 집중해야하는 어찌 보면, 여행 자체 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100여 편의 기행시를 상재했다는 것은 시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과 시인으로서의 절대적 사명감이 시인의 삶을 좌우지했다는 하나의 증표일 것이다.
4, 독특한 표현 양식과 개성
시인의 에스프리는 대체로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은유법에 의해 생성된다. 시편 도처에서 나타나는 ‘암시적 은유(implicit metaphor)’와 ‘혼합 은유(mixed metaphor)’ 등과 더불어 환유에 의한 기법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의 시가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고도의 기법들이 차용되기 때문이다. 당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관념시의 형태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한자어의 사용과 환유적 이미지가 돌출하면서 만들어내는 공간의 비약은 시인의 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표현 양식이며 개성이기도 할 것이다.
웃옷을 벗어던지는 나의 친구의 소매에서
버걱버걱 신바람을 튕기며
쏟아지던
콸콸 쏟아지던
웃음소리.
헤어지기보다 만나기가 쉽다던
친구의 이마를
두어 마디 노을이 지나갔고
어링어링 하다가
밤은 왔는지
밤은 넘어섰는지.
부산하게 끓어오르는 休紙의 높이가
石階를 오르내릴 때
달은 떴으리.
버그럭 대는 바닷 풀의 냄새를
따 담으며
번쩍 스치는
閃光의 갈기.
-<저, 소금장수의 눈>전문-
표제시인 위 작품 역시 이러한 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하겠다.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음에도 연과 연 사이의 비약으로 인하여 시를 읽어내는 게 쉽지는 않다. 친구의 웃음소리와 모습과 둘 사이를 지나온 세월까지 표현되어진 이 시 속의 외연과 내포의 깊이는 시인 특유의 암시적 은유와 혼합 은유의 아우라를 잘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예술적 성취에 천착해온 시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달’을 ‘저, 소금장수의 눈’으로 묘사되어지는 그 정점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休紙 ,石階, 閃光같은 한자어가 한글세대인 독자들에게는 시각적으로 차단효과를 가져오는 점이다. 휴지, 돌계단, 섬광처럼 한글로 표시된다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시인의 개성을 부각시키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작금의 시작법에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 역할을 하는 면이 없잖아 있을 것 같다. 한자 세대가 가고 한글 전용세대의 도래와 더불어 한자어의 퇴색과 순수 우리말로 이루어지는 시어의 다재다능한 어감이 표현 양식에 있어서 변화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시의 춘추전국시대라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만치 온갖 주류의 시들이 혼재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자신의 뭄안에 끌어안는다면 탐미적인 시세계를 이루고 있는 시인의 예술성이 더한 성취를 이룰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시대사와 문학사면에서 외면할 수 없는 1960년대의 시인으로써 참여시와 서정시의 결곡한 대립 속에 오직 현실성과 예술성의 조화와 시에 대한 언어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해왔던 시인은 주제 면에서 떠남과 남아있음의 시공간적 구축물을 미적으로 재현시킴으로써 자기 전통의 객관적 수립에 성공한 시인임을 이번에 상재된 시집을 통하여 소상히 보여준다. 이러한 시인의 커다란 족적을 더듬을 수 있다는 것은 후배시인으로써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논어’에 보면 종심(從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뜻대로 행하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지않아 종심(從心)에 이를 시인의 시적 행보는 이제 “뜻대로 행하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자기완성의 시점이라 여겨진다. 아무쪼록 더욱 건강하셔서 여전히 시혼이 살아 숨 쉬는 시들을 보여주시기를 기원하며 부족한 필설이 논한 것을 귀엽게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저, 소금 장수의 눈’처럼 건강한 시의 원시림을 밝히는 달빛, 閃光의 갈기가 밤을 새워 시를 쓰는 시인의 계단 위에 환히 비치기를 소망해본다.
'너머의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과 현실, 존재의 시학-김종철 시선 집<못과 삶과 꿈> (0) | 2015.09.10 |
---|---|
신성과 모성, 그 사랑의 생명나무 -김남조 시선집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 (0) | 2015.09.10 |
절정의 始原(시원)에서 부르는 노래 (0) | 2015.09.10 |
식물적 상상력이 밀고 가는 법고창신의 우주 (0) | 2015.09.10 |
문(文)과 신(神)과 성(誠)의 영역을 넘나들다 (0) | 2015.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