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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그늘

트롬 세탁기에 관한 생각

by 너머의 새 2015. 9. 23.

트롬 세탁기에 관한 생각 /강영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우레·번개가 칠 때
벼락과 함께 땅에 떨어져 수목을 찢어놓고
사람과 가축을 해친다는
뇌수 한 마리, 우리 집 세탁실로 들어왔다.
들어온 날부터 외눈박이 눈을 부라리더니
남편을 삼키고 나를 삼키고 아이들을 집어 삼킨다.
소용돌이치는 220볼트, 쇠 이빨이
뒤따라온 골목길과 먼지 묻은 발자국을 지워나간다.
열대성 호우 쏟아지는 내장 속에서 술 취한 바지와
가리지날 꽃무늬 원피스가 엉켜 붙는다.
시너지효과만 주절대는
팬티와 브라자, 쌍방울표 메리야스는
멀티 오르가즘을 탐색하다 빈혈을 일으킨다.
게임기에 빠진 모자와 양말이 게임 속도를 높인다.
천상의 속도와 지상의 속도가 맞붙자
괄약근을 조이는 세상이 쿨럭거리며 구정물을 쏟아낸다.
잃어버린 낙원이 물기 하나 없이 탈수 된다.
우리 아직 살아 있지?
햇빛 좋은 베란다에 환골탈태한
감색 바지와 꽃무늬 원피스
눈높이가 다른 모자와 양말이 나란히 널린다.
거꾸로 보는 하늘이 파랗다.

하느님도 가끔은 지구라는 통을 통째로 돌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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