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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리뷰

이승과 저승에서 쓰는 사랑편지/ 이성혁

by 너머의 새 2019. 1. 16.

이승과 저승에서 쓰는 사랑편지/ 이성혁

​                ■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조명한다-『애지』 2014년 겨울호 ​에서

 강영은 시인의 다섯편의 신작시를 읽으면서 가장 오래 눈이 머물렀던 시는「슈퍼문super moon」 이었다. 이 시는 다른 네 편의 시, 더 나아가 예전에 보여주었던 강영은의 시풍과는 차이가 나는 시색詩色 -폭력적일만치 격렬한-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문'이란 알다시피 지구와 달이 가장 근접해 있어서 평상시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크게 보이는 달을 말한다. 보름달이 뜨면 인간이 늑대로 변한다는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달은 통상 인간성의 뒷면인 동물성,  또는 무의식적 욕망을 활성화 하는 존재로서 여겨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달은 폭력과 섹스, 타너토스와 에로스를 동시에 불러 들인다. 달빛에 감염된 자는 무의식에 점령된 의식이 착란에 빠지고 망상이 펼쳐질 것이다. 달은 그러한 자신의 위력을 가장 강력하게 지구에 떨치게 될 때가 슈퍼문이 뜰 때이다.「슈퍼문」은 강영은 시인이 그러한 '슈펴문'에 홀려 혼잣말 하듯이 써내려간 시가 아닐까, 시 천체의 구성이 수수께기 같은 구절들이 몽타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시에 접하면서 처음 접하게 된 " 시체 위에는 수박밭과 고추밭이 있었는데 개는 안 짖었습니까,' 라는 첫행부터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가 무질서한 헛소리의 전개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이 시의 구성은 어떤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 1,3,5,7,9 연은 슈퍼문의 현상에 대한 어떤 화자의 질문 또는 놀람에 찬 혼잣말로 이루어져 있다. 2,4,6,8 연은 슈퍼문 아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 형식의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10연은 9연까지의 진술을 바탕으로 깊은 서정적인 문장을 흘려보낸다. 시인에 따르면 슈퍼문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있다. '이유 없이' 드는 슈퍼문은 무의미하지만 슈퍼문이 뜨면 세상이 혼돈에 빠진다는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슈퍼문이 떠 오를 때는 아프리카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 위성 같은 연인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릴 때", 그리고 '사람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말라붙은 대지의 젖가슴을 빨 때' 이다. (이 늑대의 이미지는 첫 행의 개의 이미지와 겹친다.) 죽음과 섹스가 뒤엉킬 때, 살육자가 지구의 젖을 빨면서 자라날 때 슈퍼문은 뜬다.

  에볼라 바이러스를 연인이 퍼트리고 늑대인간이 늑대로 변모시키는 달로 인한 혼돈은 "합삭이 될 때까지 지속" 된다. 합삭이란 일식, 즉, 태양- 달- 지구가 순서대로 일직선상에 놓일 때다. 이 때엔 태양은 달에 가려 보이지 않고 태양빛은 달의 뒤편에 닿아 있어서 지구에는 달그림자만 드리우게 된다. 달이 빛을 발하지 못할 때까지 혼돈은 계속되면서 죽음의 섹스, 지구에 대한 강간이 이루어진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초록의, 눈부신 음부를 향해 " "지구의 무릎 안쪽으로 커다란 자지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은 한편으로 "삭망이 될 때까지 지속" 된다. 삭망이란 합삭과는 달리 태양- 지구-달이 순서대로 일직선상에 놓이게 될 때이다. 삭망 때에 조류 운동을 일으키는 기조력이 가장 세다고 한다. 삭망은 달이 지구에 가하는 힘이 최고조에 이를 때, 즉 달빛이 정점에 이를 때인 것이다. 그런데 "포기할 수 없는 달빛이 차"오르는 오늘밤이 "또 다른 위성" 같은 슈퍼문의 밤 아래에서, 화자는 " 주기적인 바닷물처럼 다음 생은 약속치 말자"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하는 9 연에서 갑작스레 서술이 대화체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9연 앞에서 서술된, 저 슈퍼문 아래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바로 화자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적인 변동과 연관된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저 달에 의해 난폭하게 강간당한 지구는 곧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난폭하게 강간 당한 의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무의식(적 욕망)의 폭력에 따라 화자 내면에 밀려드는 밀물이, 화자가 서로 "개처럼 윙크"하면서 대면하고 있는 누군가인 당신의 "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 가득" 출렁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화자의 또 다른 '나' 아닐까? 이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그 또 다른 나는 분명 타자이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나를 이루게 된 연인으로서의 타자, 하여, 슈퍼문 아래에서 첫 연에 등장한 "개처럼  윙크" 하면서 서로를 갈구하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결코 합치될 수 없는 타자들이기 때문에 무의식(적 욕망)의 밀물은 "절망의 발바닥" 으로 나타나는 것일 테다. 이에 따르면 육감(동물)적인 사랑의 열정은 절망의 밀물을 끌고 온다.

 지금까지 「슈퍼문」을 이렇게 길게 읽어오면서, 이 시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살펴본 셈인데, 하지만 이런 읽기와는 다른 읽기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해석하기 모호하고 독자에게 수수께기를 던지는 부분이 많은데 , 이는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일 테다. 그 의도란 '슈퍼문'이 지닌 힘을 빌려 무의식에 개방적인 시를 쓰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의 내면에 품고 있었던 무의식의 공간내의 이미지들을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이미지들은 사랑과 죽음의 세계, 더 나아가 사랑과 죽음-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에서 오는 아름다움에 연결되어 있다. 「고독에 대하여」는 ,「슈퍼문」과 연결해서 읽으면 , 시인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 사색하고 있는 시라고 생각된다. . 이 시의 공간은 고독한 내면 -'몸속'-에 펼쳐져 있는 서천 꽃밭이다. 서천꽃밭이란 어떤 곳인가? 시인의 고향인 제주도에 전승되어 온 무가에 따르면, 서천꽃밭은 이승과 연결되는 신비의 장소로서 저승의 동쪽 끝에 있는 곳이다. 즉, 시인의 몸속에는 저승과 연결되는 장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서천꽃밭에는 여러 꽃이 있다. 이 중에서 시인은 "도환생꽃, 웃음웃을꽃, 싸움싸울꽃" 을 들고 있다. '웃음웃을꽃'을 보게 된 사람들은 정신없이 웃게 되며 ,'싸움싸울꽃'을 보게 된 사람들은 정신없이 서로 싸우게 된다고 한다. 한편으로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그 꽃들로 인하여 "  

저 혼자 웃고 우는 싸움질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서천으로 향해있는 "거기서부터 내 몸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하여튼 시인은 자신을 서천곷밭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꽃을 관리하는 '꽃 감관' 이라고 규정한다. 꽃의 관리란" 꽃 울음 받아 적는" 일이다. 그 '받아 적기'란 시쓰기를 의미할 것인데 , 그 한 예가 죽음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 새가 날아가는 서쪽 방향"을 바라보면서 "붉다" 라고 쓰는 것이다. 시인이, 붉은 노을을 받아적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노을은 꽃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런데 꽃들의 마음이란 시인 몸속 서천꽃맡에서의 시인의 정동 을 의미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닐 터, '붉음' 은 바로 그 시인의 정동을 표현하는 색이라 하겠다.

 한편,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는 저승-서천- 을 향한 시인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지 시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시인 자신은 서쪽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 어둠이 무거워 날지 못하는 새" 이기 때문이다. 서천으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둠의 무게 때문에 그곳으로 쉽사리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무거운 어둠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시인에 따르면 자신이 서 있는 서천 꽃밭의 배후는 섬으로 존재하는 그 자신이다. 시인이 자신의 몸속에 있는 저승과의 경계선에 서 있을 때, 그 '배후'에는 "불에 탄 돌덩이가 기어다니고 느닷없는 바람이 몰아치는"섬-'자신' 이 있는 것이다. 그의 영혼은 그만큼 격정적이란 의미일텐데, 그런 격정의 끝에 바로 " 지상에서 가장 가가운 꽃밭" 인 몸속 "서천꽃밭" 이 존재하는 셈이다. "나의 신은 '섬'시인의 둘레에 "어두워가는 바다","-가장 큰 저승을 " 앉혔다. 섬인 시인은 그 바다의 파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 파도 속에 존재하는 "새를 새로 꺼"내보면 , 시인이 "너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신은 말하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새를 만"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새는 어두워져 가는 바다-가장 큰 저승- 속에 있으므로 날개 위에는 저승의 어둠이 눌러 앉아 있을 터, 시인이 날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저승이 무게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노을이 붉게 지고 있는 서쪽 방향- 서천-으로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지만 이미 저승의 어둠에 그의 날개가 젖어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날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서천꽃밭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국과 지옥을 한꺼번에 경험하면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몸속에 있는 이 서천꽃밭은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의식이나 정신과 달리 사람의 몸 자체가 세계의 몸인 지상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강영은 시인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무의식적 욕망이 지상과 교통할 수 있는 자신의 몸속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은 시를 쓰기 의한 것일 테다. 그 경계에 있는 꽃밭에서 꽃의 마음을 받아적으면서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죽음과 연결된 공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를 쓰면서 그의 영혼은 재생될 수 있을 것이다. 서천꽃밭에 영혼이 재생된다는 '도환생꽃' 이 있는 것-시인은 이꽃 역시 언급해두고 있는 바-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이렇게 존재와 마음의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서귀포」의 앞부분을 보면, 고향 서귀포의 풍세와 연관된  기억 또는 경험과 관련된 것 같다.

서귀포에서는 누구나 섬이 된다.

섭섬, 문섬, 범섬이 새섬 같은 섬이

사람의 배후여서

세연교 난간에 한 컷의 생을 걸어놓은 사랑은

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된다.

서귀포에서는 누구라도 길을 묻는다.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

길 위에 서서 여기가 폭포냐고,

서 있는 곳을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거기서부터 서귀포는

​언제나 서쪽이다.

​              -「서귀포」부분

 「고독에 대하여」에서는  꽃밭의 배후에 웅크린 섬인 '나'가 존재했다면 , 위의 시에서는 사람의 배후에 섬이 존재한다. 그러나 꽃밭이 '내 몸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서귀초에서는 누구나" 사람의 배후인 섬이 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두 시의 섬은 유사한 존재라고 하겠다. 다만 위의 시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기 보다 는 누구나 섬이 되도록 만드는 서귀포라는 장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언제나 서쪽" 에 있는 서귀포는「고독에 대하여」에서 시인이 바라보고 있던 서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귀포는 죽음과 연결된 장소이다. 그곳에서 "생을 걸어놓은 사랑은" "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서귀포에서의 사랑은 일몰, 즉 죽음을 통과하면서 타인- 다른 섬-에게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서귀포는 사람들을 섬으로 만드는 동시에 눈 앞이 점점 어두워지는 일몰에 빠뜨리기 때문에, 누구라도 "길 위에 서서" 길을 묻게 되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묻게 된다.

 위의 시의 후반부는 시인이 저승일 검은 바다로 난 길-"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만이 있는 서귀포에 머물면서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편지는 일몰의 "노을처럼""긴 문장이 따라오는 지상" 에서 작성된다. 노을과 같은 문장, 어두워져 가는 문장, 죽음이 스며든 문장, 그것은 죽은 이에게 보내는 문장이 아닐까? 죽어 바다를  "떠도는 섬" 과 같은 이에게 보내기 위해, 그 바다에서 떠돌고 있는 죽은 이를  "마음속에/붙잡아 앉"혀 놓고 쓰는 편지, 그래서 그 편지는 아름다운 것이리라, 시인에 의하면 죽은이에 대한  "기억만큼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편지는 참혹한것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쓰는 그 편지가 바다저편 저승에 있는 수신인에게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붙는 해안선을 지나면 또 해안선" 이기에 " 언제쯤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수수께끼와 만나게 된다. 해안선은 왜 '불붙는' 것인가? 한편으로 시인은 그 해안선에 대해 "녹두죽 같이 끓고 있는 바닷가"라고도 쓰고 있다. 해안선에 불이 붙어 바닷가는 녹두죽 같이 끓고 있다는 것, 그런게 서귀포의 끝자락인 해안선은 섬이 있는 저승의 바다와 이승의 지상과의 경계선 아니겠는가. 「고독에 대하여」에서의 서천 꽃밭과 같은 장소가 해안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이 격렬하게 부딪히면서 불이 붙는 것인가? 위의 시만으로는 명확히 알기 힘들어서 추측만을 할 수 있뿐이다. 여하튼 그 불붙은 경계선 -해안선-은 , 그곳 부근 "찻집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는 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동을 가리키고 있기도 할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불이 붙은 정동속에서 , 시인의 마음 속 '녹두죽'이 끓고 있는 것, 여기서 또 다른 물음이 떠오른다. 그런데 '녹두죽' 은 위의 시에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마도 시인이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 바다를 떠도는 수신인은 어머니이기에 녹두죽이 등장하는 것일 테다. 「녹두」를 보면, 시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

​녹두라는 말이 좋았다.

​녹두 밭 한 뙈기가

​헐어있는 입 속을 경작했던 것인데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

​녹두꽃 지는 거기가 저승이어서

​녹두는 보이지 않았다

녹두가 너무 많은 곳,

​녹두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나는 어떻게 인간이 되나,

​녹두를 생각하는 동안

​초록이나 연두가 희망을 쏟아냈지만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여물지 않은 입안에 가시가 돋고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혓바닥을 찔렀다.

눈을 뜨면 ​젊은 어머니가 앉아계셨다.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나는 진정 아픈 빛깔에 시중들고 싶었다.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었다.

​오후 여섯시에 찾아든 파랑새처럼

​녹두밭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녹두」전문

 아름다운 시이기에 다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하여 앞 페이지에 실린 시의 전문을 여기에도 복사해왔다. 위의 시는 녹두죽을 둘러싼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고통스러운 성장기가 절묘한 상상력으로 얽히면서 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을 끌어 올리고 있다. 

 시인에게 녹두꽃은 어머니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시인에게 " 녹두라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그 말을 발음할 때에 어머니의 품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기억이 어머니가 쓰어주엇던 녹두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두죽은 열을 내려주기 때문에 열감기에 효능이 좋다고 한다. 위의 시의 첫부분을 보면, 어린 시인이 열병으로 앓고 있을 때, 어머니가 녹두죽을 쑤어주신 모양이다. 그런데 녹두죽은 먹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입천장을 데어서 입안이 헐어버린다. 아마 어린 시인 역시 녹두죽을 먹다가 입천장을 덴 것 같다. 시인은 이를 놀랍게도 "녹두 밭 한 뙈기가/헐어있는 입 속을 경작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이 표현이 가능한 것은 녹두가, 어머니, 또는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시인의 입을 경작한 것이며, 하여시인이 녹두죽을 먹고는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 날 수 있었다. 그 '콩알갱이'는 사랑-녹두- 에 의해 돋아난 사랑의 산물- 녹두콩인 것이다. 

 녹두를 먹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먹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먹음으로써 녹두의 산물인 콩알개이가 돋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콩알갱이가 돋아나는 '거기'는 어머니가 사라지면서 "녹두는 보이지 않""녹두꽃 지는" 곳, 녹두의 '저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시인이 어머니를 먹어오면서 어머니는 점차 저승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어머니가 존재하게 되는 그 저승은 '어머니- 녹두'를 먹은 시인의 몸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어머니- 녹두'는 시인의 감기를 치유하면서 시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의 몸속에 존재하는 저승은 '어머니-녹두'가 너무 많은 곳이기도 한 것이다.그리고 그곳은 어머니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 몸속의 '거기'를 저승이라고만 단정적으로 말할수는 없고 그곳은 시인의 삶과 어머니의 죽음이 만나는 경계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녹두-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이면서도 너무 많은 곳이기도 한 역설의 지점, 자신이 보이지 않는 그 장소에서 시인은"나는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윤리적 고뇌에 빠지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고뇌와 녹두에 대한 생각이 얽히면서, 시인은 녹두의 초록이나 연두에서 희망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이라고 할 때 희망이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직결된다고 하겠다. 희망이란 말이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이 되는 것은 희망이란 어머니를 먹으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을 떠올리면서 시인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며, 그래서 그의 입천장에 돋안난 콩알갱이는 한편으로 '혓바닥을 찌르는'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가시는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눈을 뜨면"시인의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 젊은 어머니가 앉아계셨"던 기억이기도 하다. 그래서 '녹두꽃-어머니'는시인에게 "진정 아픈 빛깔" 이었으며윤리적 고뇌에 빠진 시인에게 그 "빛깔에 시중들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 녹두밭에 앉"아서녹두를 골라먹는 파랑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다는 의지다.시인은 이의지로서 '인간' 으로서의 자신을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녹두는 절묘한 사모곡이자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방금 행한 독해에 따르면, 시인에게 어머니는 사랑의 대상이자 자신을 형성한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읽으면,「머나먼 눈부처」에 등장하는 '그대'란 바로 시인 자신의 일부가 된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 시에서의 '그대' 를 특정한 대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는 '그대' 를「녹두에서의 어머니로 보고 독해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눈부처란 상대방의 눈에 비친자신의 형상을 뜻한다. 반대로 나의 눈에 비친 상대방의 형상 역시 눈부처라 할 수 있다. 「머나먼 눈부처에서의 '그대'란 시인의 눈에 비친상대방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자신을 눈에 비추고 있는 상대방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대' 에서 시인의 어머니를 읽고 있는 이 글에서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어머니는 시인이 아프게 기억하고 잇는 대상이면서도 시인 자신을 이루게 해주는 ' 또 다른 나'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따르면 , 시인은 또 다른 나이지 기억 속의 어머니가 없다면 "늪에 빠져 죽은 사람" 이 되러버릴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 그대의 표정과느낌이" 시인의 현재인 삶-오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대의 눈에 비친 눈부처는 돌로된 부처이기도 하다. 기억 속의 상대방인 어머니는 "머나먼 스와니강이 없는 것처럼" 현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상대방이 없으면시인은 " 죽은 돌" 이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머나먼 스와니강" 은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미국민요다.그립지만 찾아갈 수 없는 고향이 바로 '머나먼 스와니강'이다. 마음속 고향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 삶의 고향인 어머니 역시 마찬가자일터, 그렇기에 시인은 '머나먼 눈부처' 라고 시의 제목을 달았을 것이며 한편으로 돌부처는 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돌부처는 그리움의 울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 시인의 삶에서 계속 존재하도록 하고 시인을 늪에 빠지지않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리움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대는 "죽은 돌에서 흘러나간어제의 별빛" 이 될 것이며, 시인은 "죽은돌" 이 되어버리리라. 그렇게 시인의 삶은 돌아가신 어머니(필자는 시인의 어머니가실제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한다.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한다)를 품으면서 살아날 수 잇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래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

 

 

 

이성혁/ 1967년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강사로 출강 中.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