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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적草笛 초적草笛 /강영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 작은 새 한 마리 살았네. 입술을 떨게 하고 심장까지 흔드는 새부리에선 거문고 같기도 하고 비파 같기도 한 선율이 울려나오곤 했네. 귤 잎사귀를 물면 귤꽃 피는 소리, 감 잎사귀를 물면 풋감 여무 는 소리, 갈잎을 물면 갈대 우는 소리 나무가 .. 2015. 9. 23.
무공적無孔笛의 봄 무공적無孔笛의 봄/강영은 ​ 입춘 날 아침 광이 오름 오른다 양지바른 기슭에는 잔설 뚫고 피어난 얼음새꽃 봉오리들 솜털 보송보송한 꽃병아리다 그 너머 새봄 유치원 원생들 노란 모자 쓴 꽃병아리다 얼음새꽃도 아이들도 멀리서보면 걸어가는 단소(短簫) 바람소리 새소리 몰고 가.. 2015. 9. 23.
제주 한란 제주 한란/강영은 ​ ​ 비바리는 제주에서 자생한 꽃이다 제주의 흙 속에 묻힌 진짜 뿌리가 아니면 잎과 줄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뿌리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마존 유역에는 몇 개씩 달고 다니는 부족도 있다지만 뿌리 행세를 하는 가짜.. 2015. 9. 23.
청견淸見 청견淸見/강영은 바람이 북풍을 몰고 계절의 끝자락으로 사라진 어제는 귤나무 잔가지를 쳤다 어린 목숨만 골라 벤 망나니가 되었다 가을에 돋은 가지라야 꽃을 피운다는 걸, 꽃피지 못 할 목숨만 남긴 허실을 접하고 나서 베이비박스에 어린 것들을 내다버린 미증유의 봄이 밥 때를 놓.. 2015. 9. 23.
해거름 전망대 해거름 전망대/강영은 태양이 슬리퍼를 벗어던진 판포리서부터 검은 길 이다 질척해진 길이 두 눈을 뽑아 해변으로 던진다 동공이 파 먹힌 새 한 마리 수평선에 얹힌다 스쳐지나간 날개를 말하는 것은 물빛 젖은 바람, 물색을 본뜬 서풍에 밀려 바다의 밑줄 같은 배 두 척이 지워진다 절.. 2015. 9. 23.
말의 후손 말의 후손/강영은  남자가 건넨 최초의 말은 눈웃음, 고삐를 쥐어준 최후의 말은 손짓과 발짓,  당근 대신 붉은 장갑을 끼고 채찍대신 잔뜩 겁먹은 눈으로 말을 따라간다 다른 부족에게 납치당한 몽골 처녀처럼 말똥냄새 땀 냄새로 범벅 진 말을 다소곳이 따라 간다 속도가 다른 말의 층위에 온 몸의 리듬과 느낌을 실어 나른다 말문을 처음 열 때처럼 말을 껴안은 등줄기가 곤두서고 말을 감싼 허벅지가 팽팽해진다 그의 말은 바람에 날리는 갈기와 근육질의 엉덩이로 세계를 질주한 속도의 후예, 매끈하게 다듬어진 등 외엔 수식이 없다 사막과 초원을 가로지른 엉덩이 외엔 안장이 없다 마음보다 먼저 몸을 낚아챈 말의 거리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것처럼 멀지만 말 타기의 기초는 마음을 여는 것, 눈 속에 들어있는 초원만 읽기.. 2015. 9. 23.
파벽의 사원 파벽의 사원/강영은  차가운 돌바닥에 피를 찍어 서간체의 문장을 쓰는 저녁입니다. 모서리가 부서진 벽의 흥망성쇠에 대해 핏자국이 묻어나는 손바닥만 읽어주십시오. 소멸된 제국의 동글고 기다란 모서리를 읽을 때마다 세습의 붓대로 바람의 갈기를 그려내는 풀들과 부서져 내린 돌조각이 빛내고 있을 폐허란, 어제의 삶은 전개 되지 않고 죽음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  돌로 된 연꽃이 초원에 피는 동안 돌이 된 남자는 온 몸에 못을 박고 돌이 된 여자는 뼈 마디마디가 불에 던져져 검은 벽으로 서 있을지 모르지만 지워지지 않는 문장 속에서 울음을 꺼내는 것은 묵언의 입술을 깨트려 쪼개진 심장 같은 파편을 보여주는 일,  돌 하나를 흔들면 돌 뿌리를 붙들고 있는 또 다른 돌이 무너져 내리고 어디 먼 데 돌산이 따라 .. 2015. 9. 23.
엘슨타사르하이* 엘슨타사르하이* /강영은 발가락이 썩어가는 밤이다 발가락을 물어뜯는 어떤 짐승도 보이지 않는데 버려진 짐승의 뼈가 사막이 되어가는 밤이다 마두금의 선율에 무릎이 꺾어져 내렸을 뿐인데 달을 끌고 별을 끌고 몸통을 져 나르는 발가락은 무엇인가 물혹을 짊어진 낙타인가 사막에 팽개쳐진 낙타의 잠인가 어쩌면 단단하게 굳은 잠 풍화를 시작하는 잠의 무게는 얼마인가 펄럭이는 잠 속을 걸어가는 낙타의 속눈썹은 아프고 가느다란 길. 눈물 한 점 흘리지 못하는 길을 따라나서는 짐승의 정체를 알 것도 같은데 너를 향해 지명에 없는 박토를 향해 기나긴 밤의 행로를 지나는 나는 잠의 문장을 읽지 못하는 낙타, 단잠을 깨무는 울음소리는 누구의 뼈 속에서 울리는 것이냐 쥐어짜면 물기뿐인 혹을 짊어지고 내가 또 어디로 떠나는 것이냐.. 2015. 9. 23.
나무를 사랑하는 법 나무를 사랑하는 법 /강영은 # 책갈피를 찾아책상 위 아래로, 책장 안팎으로 헤매는 일은 허다한 일, 그것은 또한 나에게 나무를 사랑하는 의무를 지우는 일, 활자들이 뒤척이는 행간에서 내 눈이 언제나 제멋대로 나무를 그려내듯이 바람은 왜 파도 소리를 내는지, 사람들은 왜 숲을 바다라고 부르지 않는지, 이파리를 따는 어부가 되는 것보다 길 잃은 물고기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 숲의, 서문을 읽다가 비늘을 잃고 단지 그것을 찾는 이유로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는 말하자면, 그것은# 티벳 사자死者의 말하기 방식을 빌어 책갈피를 다시 찾는 일,푸르거나 희거나 나무의 그늘은 제 몸이 나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한 참나무는 불쏘시개가 되고 속이 헛헛한 헛개나무는 제 몸에 인두로 문장을 새기지만 죽음의 상처에서 .. 2015. 9. 23.
병산 수묵화 병산 수묵화/강영은 어둠이 붓을 친다 병산이 수묵화로 펼쳐진다 먹물 몇 점 떨구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만대루 넘어 가느다란 달빛, 먼 데 바다를 풀어 놓는지 강물을 破墨치는 필선이 우련하다 흐르는 것들은 경계가 없다 담담하다 비워냄으로써 완성되는 수묵 깊이에서 마음만 저 홀로 붉은 낙관을 찍는 것일까 화폭 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밑그림도 없고 되 물릴 수순도 없는 첩첩 산, 겹겹 물 한지 밖 그대와 내가 만나는 경계는 골 깊은 먹 굵은 一劃으로도 메울 수 없는 몰골법이다 2015. 9. 23.
백조의 호수 백조의 호수/강영은 뜨거운 후라이팬 바닥을 휘젓는다 참깨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뒤꿈치를 드는 참깨, 무릎 구부리는 참깨, 한 다리를 직각으로 펴는 참깨, 깨금발 군무를 시작한 참깨들이 “백조의 호수” 무용수 같다 여기저기 작은 무용수들이 튄다 한 발이 올라가면 한 발 세상이 튄다 깨금발 세상이 튄다 발가락이 누렇게 타들어간다 뒤꿈치가 발갛게 벗겨진다 토슈즈 속, 물집 터진 발가락이 가득 들어찬다 물집은 눈물의 집, 발레리나 강수진은 깨금발 세상을 들어 올리느라 일주일에 천 컬레의 눈물을 버렸다지? 천 켤레의 리듬, 천 켤레의 눈물이 허공을 휘젓는다 휘휘 돌아가는 깨금발 세상이 어지러워 나도 모르게 한 발을 든다 왼발 오른발, 번갈아 들며 리듬을 탄다 허공을 높이 찰수록 허공에의 몰입은 고소해지는 걸까 .. 2015. 9. 23.
라르고 풍으로, 라르고 풍으로,/ 강영은 온음표를 뒤집어 쓴 거리를 2분음표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4분음표의 자동차와 버스가 윈도우 속에서 사라진다 하얀 털모자를 눌러 쓴 낙산 위에선 16분음표의 바람이 썰매를 탄다 공원의 비둘기들은 엇박자 8분 음표, 종종거리는 빨간 종아리들은 몇 분 쉼표의 허.. 2015.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