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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화엄경 먼지 화엄경/강영은 섣달그믐 날, 총체를 들고 먼지를 턴다. 하나로 묶인 말꼬리 속, 유리창의 투명 얼굴이 털려나가고 책갈피의 자음과 모음이 털려나가고 피아노의 흑백 계단이 털려나가고 커튼자락 주름 잡힌 고뇌가 털려나가고 냉장고 위 두껍게 쌓인 침묵이 털려나간다 햇빛 속, 보.. 2015. 9. 23.
키스의 남방 한계선 키스의 남방 한계선/강영은 정체불명의 바람과 입 맞춘 날, 누구의 입술이 입술 속에 들어 있었나 키스가 끝났을 때 사시나무 떨듯 오한이 왔네 한 밤중에 선인장 꽃 같은 열꽃이 피고 멕시코 만을 건너온 구름의 음모라고, 당신은 해석하네 목구멍 속의 기류를 판독하는 건 죽음이 허락.. 2015. 9. 23.
나비, 날다 나비, 날다 / 강영은 나비야, 함평가자. 버스타고 기차타고 봄처녀나비처럼 수줍게, 유리창에 둘러붙은 유리창떠들썩나비에게 눈인사 잊지 말고 넥타이 맨 큰멋쟁이나비에게 아침이슬 한 잔 건네기도 하면서, 높은산지옥나비의 지옥은 높은 산일까, 붉은점모시나비 옷깃에 찍힌 붉은 입.. 2015. 9. 23.
마흐의 띠* 마흐의 띠*/강영은 여우비에서 잠깐 떨어져 나온 햇살처럼 당신은 태양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새떼를 생각한다. 까맣다가 점점이 사라진 날개는 내일로 날아간 난해한 문장, 깃들이다와 길들이다 사이, 수식어가 절제된 날개는 모호하다. 어제를 죽지에 매달고 사라진 새들의 길거나 짧은 날개를 겨드랑이에 심는다. 나는 새벽에 울 수 있을까, 울음은 희부윰한 새벽을 복제할지 모르지만 어디로 어떻게 날아가는지, 묻지않는 날개는 모든 가벼움의 은유, 암묵의 종착지, 마음이 젖은 깃털을 탁란 하는 오후 5시, 모자에 맨 실크 리본이 어둡거나 밝게 빛나던 그 때, 당신은 새털구름이 지나간 하늘을 모자의 띠처럼 둘렀다 풀어 놓는다. * 밝기의 대비현상(對比現象)의 일종 2015. 9. 23.
거미의 修辭學 거미의 修辭學/강영은 어둠 속 무심코 내딛은 발목이 거미줄에 포획 당했다. 그물코는 작아서 보이지 않고 그물은 너무 가늘어 소름이 돋았다. 누가 누구의 발목을 잡은 것인지 능동과 수동의 주체가 묘연한 순간을 미완이라 해야 하나, 해체라고 해야 하나. 눈높이가 다른 사랑이라 해야.. 2015. 9. 23.
안티고네를 읽는 새벽 안티고네를 읽는 새벽/강영은 안구건조증을 앓는 새벽이에요 쥐똥나무는 문장 속에 꼼짝 않고 서서 간혹, 검은 열매를 떨구고 바람벽을 넘던 고양이는 왜 우는지 모르는 그림자를 긁고 있어요 흐린 풍경을 거둬들인 눈동자는 다른 눈을 생각해요 풀무처럼 바람을 한 입 물고 같은 발 음.. 2015. 9. 23.
무리수를 읽는 법 무리수를 읽는 법/강영은 젖은 7월이 우산 위로 기운다. 빗방울 하나가 손등을 타고 굴러 떨어진다. 빗줄기가 슬어놓은 물꽃, 꽃은 웅덩이에 파문을 낳고 그리움의 둘레는 끝없이 퍼져나간다. 물수제비를 뜨는 새들은 젖은 깃털에 우기를 묻어둘지 모르지만 나는 처마 밑에 흐 르는 태양.. 2015. 9. 23.
바실리스크 바실리스크/강영은 -커다란 물 도마뱀이 내리는 도시, 오후가 늪 속에 잠겨 비대해진다. 창 궐하는 늪을 개인적인 슬픔이라 버텨보지 만 방주를 기다리는 슬픔은 속절없는 고대의 양식, 우울한 몽상가처럼 비의 알약을 삼킨 유리창은 울지 못 한다.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될 불문율이 이 도.. 2015. 9. 23.
악어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악어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강영은 삼킨 먹이가 소화되는 동안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건 악어뿐이다 먹이를 쉽게 삼키기 위해 수분을 보충하는 파충류의 습성 때문이라지만 악어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동공에 맺힌 눈물이 사람의 눈물처럼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 2015. 9. 23.
트롬 세탁기에 관한 생각 트롬 세탁기에 관한 생각 /강영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우레·번개가 칠 때 벼락과 함께 땅에 떨어져 수목을 찢어놓고 사람과 가축을 해친다는 뇌수 한 마리, 우리 집 세탁실로 들어왔다. 들어온 날부터 외눈박이 눈을 부라리더니 남편을 삼키고 나를 삼키고 아이들을 집어 삼킨다. 소.. 2015. 9. 23.
허공모텔에서 지은 날개 옷 한 벌 / 주경림 허공모텔에서 지은 날개 옷 한 벌 / 주경림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지난 가을의 초입, 강영은 시인의 『녹색비단구렁이』(종려나무)가 녹색의 껍질을 입고 내게 배달되었다. 비단옷은 아닌 녹색 종이봉투였지만 눈부셨다. 그 봉투 속에서『녹색비단구렁이』가 꿈틀 기어나왔.. 2015. 9. 22.
몸 지닌 것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혀 /최 준 (시인) 몸 지닌 것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혀 /최 준 (시인) -『녹색비단구렁이』 북리뷰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는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가 주목한 그대로 ‘몸’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이 시집에 관한 한 강영은 시의 키워드는 ‘몸’이다. 몸은 태어.. 2015. 9. 22.